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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성을 잃은 정치적 <양상군자>는 더 이상 정치가일 수 없다.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적 모듬살이

이성적 동물과 정치적 동물은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politikon zōon)이다. 인간은 또 자연적으로 이성적 동물(logon zōon)이기도 하다. 이 두 정의는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말벌, 꿀벌, 개미와 인간은 다 같이 자연적으로 무리를 져 군집생활을 영위한다. 다만 다른 곤충과 다른 점은 가정, 마을, 국가와 같은 <공동체>(koinōnia)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다른 군집 동물보다 더 정치적이다.

이러한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합리적>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자연적으로 구비하고 있다. 바로 이 이성적 언어 능력이 “유익한 것 혹은 해로운 것, 따라서 정의로운 것과 불의한 것을” 분명하게 구별하게 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자연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라는 것은, 곧 이성적 동물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좋음을 목표로 살아간다. 왜! 그 궁극적 목적은 더 <잘 살기> 위해서이다. <잘 삶>은 행복(에우다이모니아, eudaimonia)을 말한다. 이 행복을 웰빙(well-being)이라 말할 수 있다. 웰빙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라는 공동체에서만 인간은 개인의 행복을 자신이 원하는 진정한 행복으로 구현해 낼 수 있다. 개인의 행복과 전체인 국가 공동체의 행복이 다른 것일 수 없다. 개인의 행복과 전체의 행복이 다르다면 인간은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를 만들어 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개인의 행복은 전체 공동체의 행복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갈등이 소멸하고, 서로 조화하고, 서로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우리>를 지향해 나아가야 한다. 인간이 보다 자족적이 되고 또 우리가 삶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행복을 구현하기 위해선 <국가>라는 최종의 최선의 공동체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도덕적 정당성을 가진 국가만이 권력을 정당성을 가진다.

(1)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유토피아적 국가의 모델을 제시했다. 인간이 목적으로 삼는 행복이 <성취가능한> 것이라고 한다면, 국가가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행복도 <성취가능>해야만 한다. 이상국가는 <경험적-현실적 유토피아>적 국가의 성격을 가져야 한다. 도덕적 덕을 함양할 수 있는 교육 정치체제를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국가의 성격은 ‘경제정치적 공동체’이기보다는 ‘윤리 도덕적 정치 공동체’(ethicopolitical koinōnia)로 파악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최선의 인간과 최선의 정체’는 동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2) 국가의 시민 교육에 대한 개입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너무도 당연한 대답이다. 긍정할 수 있다면 정당화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좋은 인간’은 ‘좋은 시민’일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시민’이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인간’일 수는 없다.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만으로 ‘좋은 인간’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좋은 인간’은 ‘좋은 시민’일 수 있을까? 기대하는 바대로 바람직한 방향에서 그런 것일 수 있으나, 여기에도 어떤 단서 조항이 따라야 하지 않을까?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시민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입법가는, 즉 국가는 인간을 좋은 인간으로, 좋은 시민으로 교육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무엇을 가르치는가? ‘덕(아레테)’다. 사적인 이익을 구하기 위해 특정의 실용적 목적만을 위한 아레테만이 아니라, ‘좋은 인간으로서 인문적 삶’을, 다시 말해 ‘철학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가활동을 하며 살 수 있는 도덕적 성향을 지닌 덕(아레테)을 가르쳐야 한다. 지나친 물신주의적 <경제적 마인드>, <실용적 유용성>만을 강조하는 국가는 개인의 도덕성을 타락시킬 수 있다.

국가는 어릴 적부터 좋은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습관을 들여야 한다. 아고라에 모여 <촛불>을 들고 정치에 참여하는 훈련을 시킴으로써 올바른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렇게 훈련 받아 성장한 시민만이 정치에 참여해 훌륭한 정치가가 될 수 있다. 이명박은 이 훈련을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타락한 정치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올바른 정치가는 어릴 적부터 도덕적으로 훈련받아야 한다.

(3) 정치지도자는 반드시 ‘좋은 인간’이어야만 한다. 정치 지도자는 왜 도덕적이어야만 하는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활동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정치적 정의를 실현한 공동체>이다. 그러나 정치적 정의를 실현해야 하는 관직에 봉사하는 정치가들이 현실적으로 다 훌륭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교육에 개입해서 ‘좋은 시민’, ‘좋은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어릴 적부터 적극적으로 나서야만 하는 것이다.

<오늘 지금 여기서>, 이명박 정부를 통하여 정치 지도자가 마땅히 지녀야 할 <도덕성>을 결여했을 때, 또 정치 지도자가 가져야 할 <인문적 소양>이 부족했을 때 그 국민이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큰 지를 우리가 몸소 체험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뛰어난 개인의 능력이라도 전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그 개인은 공동체 전체의 이익과 행복에 기여할 수 없다. 가장 아름다운 눈, 귀, 입, 코를 한 얼굴의 그림으로 채워 넣었다고 해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평등한 눈, 귀, 입, 코를 통해서 전체의 조화를 이루었을 때, 그 얼굴은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결코 뛰어나지도 못한 정치가가 전체의 뜻을 따르지도 않고, 전체의 생각과 조화를 이루지도 않은 채 오만과 독선에 가득 찬 지도력을 발휘하려 할 때, 국민이 겪는 고통과 영혼의 상처가 얼마나 큰 지를 <지금 여기서> 우리가 몸소 체험하고 있지 않은가?

한 인간의 훌륭함과 전체를 구성하는 시민들의 훌륭함을 만들어 가는 것은 교육의 목적이다. 이 교육이 실패했기 때문에 <오늘 여기서> 우리가 보는 이명박과 같은 사이비 정치인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교육은 <평등성>에 기반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이 교육의 담당자가 바로 입법가요 정치가인 것이다.

(4) 정치철학적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규정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국가는 도덕적 인간과 정치적 인간의 교섭적 관계에서 성립하는, 도덕성에 기반하는 윤리적 정치체제의 질서인 셈이다. 시민의 도덕성, 시민의 평등성, 시민 자신의 이익이 아닌 전체의 이익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시민의 총의에 따르는’ 정치체제이다.

국가(공동체)의 도덕성을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그의 정치철학적 국가 이론은, 오늘날 이윤을 극대화하는 신 자유주의적 경제 질서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체제와는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것으로 보인다.



                                                                 by 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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